11월이 가까워지면 프리미어리그 그라운드에 작은 변화가 생긴다. 선수들의 유니폼 가슴께에 붉은 꽃 한 송이가 수놓인다. 구단의 새 엠블럼도, 스폰서 로고도 아니다. 경기 전에는 선수단과 관중이 함께 고개를 숙이고, 전광판과 관중석에도 같은 꽃이 걸린다.

이 꽃의 이름은 포피(Poppy), 붉은 양귀비다. 영국에서 전쟁으로 숨진 이들과 전쟁의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들을 기억하는 상징이다. 축구 유니폼 위의 작은 꽃이 어떻게 100년 넘는 역사와 이어졌는지, 그리고 경기가 끝난 뒤 그 유니폼이 어디로 가는지 따라가 봤다.
전쟁터에 피어난 붉은 꽃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벨기에 플랑드르는 서부전선에서 가장 치열한 격전지 중 하나였다. 포탄에 뒤집힌 흙 사이로 이듬해 봄 붉은 양귀비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캐나다 군의관 존 맥크레이는 1915년 전우를 잃은 뒤 이 풍경을 시 〈플랑드르 들판에서(In Flanders Fields)〉로 남겼다.

시가 널리 읽히면서 붉은 포피는 전쟁 희생자를 기억하는 상징이 됐다. 그래서 영국에서 포피를 단다는 건 어느 팀을 응원한다는 뜻이 아니다. 추모에 동참한다는 표시다.
왜 하필 11월 11일일까

1918년 11월 11일 오전 11시, 서부전선의 휴전협정이 발효됐다. 영국은 이날을 정전기념일(Armistice Day)로 기리고, 매년 11월 11일 오전 11시에 2분간 묵념한다. 11월 둘째 일요일에는 추모의 일요일(Remembrance Sunday) 행사가 열린다. 올해는 11월 8일이다.
프리미어리그 구단들은 보통 10월 말부터 11월 11일 무렵까지 포피를 단다. 이 시기 경기를 보다 유니폼에서 붉은 꽃이 눈에 띄는 이유다.
1915 — 존 맥크레이, 〈플랑드르 들판에서〉 발표
1918.11.11 오전 11시 — 서부전선 휴전 발효
1921 — 로열 브리티시 리전, 영국 첫 포피 모금 캠페인
2012 — 프리미어리그, 로열 브리티시 리전과 파트너십 시작
작은 꽃으로 이어지는 100년의 모금

1921년 영국에서 첫 포피 모금 캠페인(Poppy Appeal)이 열렸다. 지금도 자선단체 로열 브리티시 리전(The Royal British Legion)이 매년 이 캠페인을 이끌며 군 복무 경험자와 그 가족을 돕는다.
프리미어리그는 2012년부터 로열 브리티시 리전과 손잡고 있다. 선수와 심판은 포피가 수놓인 특별 유니폼을 입고, 경기 전에는 묵념과 헌화가 이어진다. 구단별 포피 핀 배지도 판매해 모금에 보탠다.
경기가 끝나면 유니폼은 경매로

포피가 수놓인 선수들의 실착 유니폼은 경기가 끝나면 사인을 받아 자선 경매에 나온다. 경매는 보통 11월과 12월에 걸쳐 열린다. 팬은 좋아하는 선수가 실제로 입은 유니폼을 소장하고, 수익은 로열 브리티시 리전의 활동에 쓰인다.
500만 파운드 이상 — 프리미어리그가 밝힌 포피 유니폼 경매 누적 모금액(2025년 기준). 1파운드를 1,800원으로 잡으면 90억 원 안팎이다.
2024년 발표 때 누적액은 470만 파운드 이상이었고, 2025년 안내에서는 500만 파운드를 넘겼다. 2024-25시즌 한 해에만 프리미어리그 구단들이 48만 3천 파운드를 모았다. 모금은 매년 이어지므로 이 숫자는 최종 합계가 아니다.
모두에게 같은 의미는 아니다

포피를 둘러싼 시선이 언제나 같은 것은 아니다. 북아일랜드 데리 출신으로 아일랜드 국가대표로 뛴 제임스 맥클린은 선수 시절 내내 포피 착용을 거부했다. 그는 1972년 고향 데리에서 영국군의 발포로 민간인들이 숨진 '피의 일요일(Bloody Sunday)'을 이유로 들었다.
로열 브리티시 리전도 포피 착용은 개인의 선택이라는 입장이다. 누군가에게는 추모의 상징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복잡한 역사의 기억이 될 수 있다. 그 차이를 함께 아는 것도 포피를 이해하는 방법이다.
그라운드 위 작은 꽃이 전하는 이야기
100여 년 전 전쟁터에 핀 꽃이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많이 보는 축구 리그의 유니폼 위에 있다. 그 사연을 알고 나면, 11월 주말 중계 화면 속 붉은 꽃이 조금 다르게 보일 것이다.
작은 꽃 하나가 기억과 나눔을 이어간다.
구단별 포피 유니폼 경매 페이지
프리미어리그 공식 경매 안내 기사에 실린 구단별 경매 페이지(MatchWornShirt)다. 진행 여부와 출품 선수는 접속 시점에 따라 달라진다.
올해 경매 전체 목록: MatchWornShirt 2026 Poppy Appeal


